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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부모와 자식 간의 정이 깊고, 이웃 간의 예절도 무척 소중히 여기는 민족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계 어느 나라 말보다 호칭어와 지칭어, 그리고 존대어가 발달해 있습니다.

 

그런데요.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호칭어·지칭어·존대어 등을 잘못 쓰는 사례를 종종 접하게 됩니다. ‘아버님도 그런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버님이 왜?” 하고 의아해하는 분들이 많을 텐데요. 남들에게 살아계신 자신의 아버지를 얘기하면서 아버님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멀쩡하신 분을 돌아가신 분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예부터 남에게 자기 가족을 높여 말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 아들을 가돈(家豚)’이나 돈아(豚兒)’ 등 돼지에 비유하기까지 했지요.

 

그런 예법은 지금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에게는 누구보다 귀하고 높으신 분이지만, 남에게 아버님이라고 높여 부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표현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국립국어원이 최근 펴낸 <표준 언어 예절>아버님자식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어머니나 조부모 외의 사람에게 지칭할 때 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표준 언어 예절> 12)에서 보듯이 자식의 위치에서 살아 계신 아버지를 가리켜 아버님을 쓰는 사용례는 없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 역시 아버님주로 돌아가신 아버지를 이르거나 편지글 따위에서 쓴다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어머님으로 높여 부르는 것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아내가 남편의 부모를 일컬을 때는 대부분 아버님어머님을 편히 쓸 수 있습니다. 시조부모 앞에서는 아버님을 못 쓰는 정도이지요. 이는 남편이 처의 부모를 말할 때도 비슷한데, 아내는 직장 동료 등 남들 앞에서 시부모를 우리 ()아버님(어머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반면 남편은 장인과 장모를 우리 아버님(어머님)’으로 부르지 못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아버지와 관련해 흔히 잘못 쓰는 말에는 선친도 있습니다. TV 드라마를 보다 보면 간혹 선친께서는 참 훌륭하셨지. 자네도 아버님의 유지를 잘 받들어야 하네따위처럼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런 장면에서의 선친은 잘못 써도 한참 잘못 쓴 말입니다. 선친은 자신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가리키는 말이거든요. “남의 돌아가신 아버지를 이르는 말은 선대인입니다. 선대인은 다른 말로 선고장이나 선장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남의 살아 계신 아버지는 춘부장’, 살아 계신 어머니는 자당이라고 하지요.

 

이 밖에 누군가 자신의 성을 물었을 때 엄씨입니다따위처럼 자신의 성 뒤에 씨()를 붙여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요. 이 또한 예절에 어긋나는 표현입니다. ‘가 높임말이기 때문이지요. 이때는 엄씨입니다가 아니라 엄가입니다, ‘대신 ()’를 쓰는 게 바른 언어예절입니다. 상대방을 얘기할 때는 엄씨이시군요라고 높여 불러주고요.

Posted by margeul

 

설 연휴가 시작됐습니다. 을미년(육십갑자는 음력의 개념이므로 설날부터 진짜을미년이 시작됩니다) 새해에는 복 많이 지어 이웃들에게도 넉넉하게 나눠 주시기 바랍니다.

 

설 하면 무엇보다 떡국이 떠오릅니다. 떡국을 먹어야 한 살을 먹는다고 해서, 부모님께 그러면 두 그릇 먹으면 두 살 먹는 거냐고 묻던 기억이 있는데,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한국인은 나이에 참 민감합니다. 싸우다가 불리하면 , 몇 살이야를 외칠 정도로 나이를 무척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 때문인지 나이와 관련한 낱말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요. 낱말이 많은 만큼 잘못 쓰는 말도 무척 많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말이 터울입니다. 여러분이 입에 달고 사는 터울말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평소에 별 생각 없이 터울을 쓸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문과 방송들도 김다현과 강태을은 각각 30세와 29세로 한 살 터울이다” “현대 전성기 시절에는 조성원과 이상민이 있었고, 조성원이 다른 팀으로 이적했을 때는 정재근 전희철(36) 등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신명호(26) 강병현(24) 등 약 10세 터울의 후배가 함께 뛴다등처럼 터울을 많이 씁니다.

 

 

하지만 위의 예문에 쓰인 터울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터울이란 한 어머니의 먼저 낳은 아이와 다음에 낳은 아이와의 나이 차이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터울이란 어머니가 같은 자식들 간의 나이 차이를 나타낼 때만 쓸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배다른 형제자매 사이에도 쓸 수 없는 터울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 사이에 쓸 수는 없습니다. 이럴 때는 그냥 살 차이로 써야 합니다.

어머니가 같다는 점 때문에 북한에서는 이 말이 한 어미로부터 먼저 태어난 새끼와 그 다음에 태어난 새끼의 나이 차이. 또는 먼저 새끼를 낳은 때로부터 다음 새끼를 낳은 때까지의 동안을 뜻하는 말로도 쓰입니다.

 

예전에 누구의 글을 교열 보다가 묘령의 남자라는 표현 때문에 피식하고 웃음을 지은 일이 있습니다. ‘묘령의 남자라니요? ‘꽃미남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묘령의 남자라는 말은 처음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혹시 하는 마음에 검색을 해 봤더니 그를 지켜보던 묘령의 남자 이춘성은 퀴즈만 잘 풀면 부와 명예가 주어지는 회사가 있다며 그를 유혹하기 시작한다” “과연 신애의 그 묘령의 남자는 누구?” 등처럼 언론에서도 묘령의 남자라는 표현을 쓴 사례가 곳곳에서 보였습니다.

 

하지만 남자의 나이 앞에는 절대로 묘령을 쓸 수 없습니다. ‘묘령스무 살 안팎의 여자 나이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죠. ‘묘령묘년(妙年)’이라고도 합니다.

 

이 밖에 어떤 나이를 뜻하는 한자말을 잘못 쓰는 일도 많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이와 관련한 한자말을 묶어 보았습니다. 제가 드리는 설 선물입니다.

충년(沖年) : 열 살 안팎의 어린 나이.

 

지학(志學) : 열다섯 살을 달리 이르는 말. <논어> ‘위정편(爲政篇)’에서, 공자가 열다섯 살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한 데서 나온 말.

 

방년(芳年) : 스무 살 전후의 한창 젊은 꽃다운 나이. 한때는 여자의 스무 살 안팎의 꽃다운 나이를 뜻하는 말이라고 했으나, 지금은 남녀 구분 없이 쓸 수 있는 말로 보고 있음.

 

약관(弱冠) : 남자의 스무 살. 또는 젊은 나이. <논어> ‘위정편(爲政篇)’에서, 공자가 스무 살에 관례를 한다고 한 데서 나온 말.

 

이립(而立) : 서른 살을 달리 이르는 말. <논어> ‘위정편(爲政篇)’에서, 공자가 서른 살에 자립했다고 한 데서 나온 말.

 

불혹(不惑) : 마흔 살을 달리 이르는 말. <논어> ‘위정편(爲政篇)’에서, 공자가 마흔 살부터 세상일에 미혹되지 않았다고 한 데서 나온 말.

 

망오(望五) : 쉰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나이 마흔하나를 이르는 말.

 

상수(桑壽) : 마흔여덟을 가리키는 말. ()자를 십()이 네 개와 팔()이 하나인 글자로 파자(破字)48세로 봄. 사전에 올라 있지는 않음.

 

지천명(知天命) : 쉰 살을 달리 이르는 말. <논어> ‘위정편(爲政篇)’에서, 공자가 쉰 살에 하늘의 뜻을 알았다고 한 데서 나온 말.

 

망륙(望六) : 사람의 나이가 예순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쉰한 살을 이르는 말.

 

이순(耳順) : 예순 살을 달리 이르는 말. <논어> ‘위정편(爲政篇)’에서, 공자가 예순 살부터 생각하는 것이 원만해 어떤 일을 들으면 곧 이해가 된다고 한 데서 나온 말.

 

환갑(還甲) : 육십갑자의 ()’으로 되돌아온다는 뜻으로, 예순한 살을 이르는 말. =주갑(周甲), 화갑(華甲), 환력(還曆), 회갑(回甲)

 

진갑(進甲) : 환갑의 이듬해란 뜻으로, 예순두 살을 이르는 말.

 

망칠(望七) : 일흔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나이 예순한 살을 이르는 말.

 

칠순(七旬) : 일흔 살.

 

종심(從心) : 일흔 살을 달리 이르는 말. <논어>위정편에서, 공자가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고 한 것에서 유래.

 

고희(古稀) : 일흔 살. 두보의 곡강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에서 온 말.

 

희수(稀壽) : 나이 일흔 살을 달리 이르는 말.

 

망팔(望八) : 여든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나이 일흔한 살을 이르는 말.

 

희수(喜壽) : 일흔 일곱 살. ‘자의 초서체가 七十七을 합쳐 놓은 것과 비슷한 데서 유래.

 

팔순(八旬) : 여든 살.

 

팔질(八耋) : 여든 살을 이르는 말.

 

장조(杖朝) : 나이 여든 살을 이르는 말. 중국 주나라 때에, 여든 살이 되면 조정에서 지팡이를 짚는 것을 허락한 일에서 유래.

 

산수(傘壽) : 여든 살. ()자를 팔()과 십()의 파자(破字)로 해석한 말. 사전에는 몰라 있지 않음.

 

반수(半壽) : 여든한 살. ()자를 파자(破字)하면 八十一이 되는 데서 유래. 사전에는 올라 있지 않음.

 

망구(望九) : 사람의 나이가 아흔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여든한 살을 이르는 말.

 

미수(米壽) : 여든여덟 살을 달리 이르는 말. ()자를 풀면 八十八이 되는 데서 유래.

 

구순(九旬) : 아흔 살.

 

졸수(卒壽) : 아흔 살. ()자의 약자를 구()와 십()으로 파자(破字)해 아흔 살로 봄. 사전에는 올라 있지 않음.

 

망백(望百) : ()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나이 아흔한 살을 이르는 말.

 

백수(白壽) : 아흔아홉 살을 이르는 말. ‘에서 을 빼면 이 된다는 데서 유래.

 

상수(上壽) : 백세의 나이, 또는 그 나이가 된 노인. 장수한 것을 상··하로 나눴을 때 가장 많은 나이를 이름.

Posted by margeul

설날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고, 달콤한 휴식에 빠질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요.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을 구정으로 부르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양력 11일을 신정이라 하고, 이에 대립하여 음력 11일을 구정이라고 하는 것인데요. 이 말은 한 번쯤 생각해 볼 단어입니다.

 

왜냐고요? ‘구정에는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하려 한 일본의 교묘한 술책과 정치군인들이 국민들을 산업 현장으로만 내몰려 한 노동착취의 술수가 담긴 말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음력을 써 왔습니다. 그러다가 1895년께 일본의 영향으로 양력을 채택하게 됐지요.

 

이후 일본은 우리 고유의 명절인 설을 없애려 합니다. 자신들의 통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자기네처럼 양력 11일을 공식 명절로 지정하고, 음력 11일에 설을 지내는 것을 탄압합니다. 설 며칠 전부터 방앗간 영업을 금지하고, 설날에는 학생들의 도시락을 뒤져 제사음식을 싸온 학생은 벌을 주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양력 11일을 신정으로, 음력 11일을 구정으로 여기는 생각이 우리 국민들의 뇌리에도 자연스레 각인됩니다. ‘신정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바람직한 날로, ‘구정은 하루빨리 없애야 할 구습으로요.

 

여러분은 신세대로 불리기를 원하나요, 아니면 구세대로 불리기를 바라나요. 또 집에 신제품이 가득한 것이 좋은가요, 구닥다리가 넘쳐나는 게 좋은가요? 당연히 신세대로 불리기를 바라고 신제품이 좋겠죠. 결국 신정은 긍정적 개념을, ‘구정은 부정적 개념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광복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 1949년에 양력 11일이 공휴일로 지정되고 1950년부터 대한민국의 신정이 시작됩니다.

 

1961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더욱 심해집니다. 우리 생활에 양력이 완전히 정착하면서 설은 쇠서는 안 되는 날로 여기기까지 합니다. 설날이 공휴일에서 제외되는 것이지요. 일제가 그러했던 것처럼요. 여기에는 노동자들을 일터로만 내몰려는 못된 경제제일주의도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다 설 명절에 관한 국민감정이 악화되자 1980년대 중반 그동안 부정적 이미지로 불리던 구정민속의 날로 이름을 바꾸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옛 이름 설날도 찾게 됐습니다. 그리고 지금처럼 3일이 공휴일로 지정됐습니다. 추석과 함께 우리 고유의 최대 명절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이지요.

 

따라서 이제 신정구정의 구분이 필요 없게 됐습니다. ‘구정설날이 됐으니, 더 이상 신정이 필요 없게 된 것이지요. 아울러 설날은 당연히 음력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굳이 음력설이라고 부를 필요도 없습니다.

 

일본의 설날을 멋진 신정으로 불러주고, 우리의 설날을 못된 구정으로 부르는 언어습관은 하루바삐 바로잡혀야 합니다.

Posted by margeul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라는 말이 성경에 나온다는 것쯤은 여러분도 잘 아실 듯합니다.


그런데요. 이 말대로라면 부자는 무조건 지옥에 가야 합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우니, 거의가 아니라 아예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종교를 떠나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아주 현명한 ‘지혜’들을 담고 있는 성경에 왜 이런 극단적인 표현이 적혀 있는 것일까요? 아니, 극단적이라기보다 이치에 맞지 않는 표현이라는 것이 더 적확하겠네요. 낙타와 바늘구멍은 도저히 격이 맞지 않으니까요.


이에 대해서는 번역의 오류가 빚어낸 잘못된 문장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원래 성경에는 ‘낙타’가 아니라 ‘밧줄’로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말이라는 아람어로 밧줄(gamta)과 낙타(gamla)는 철자 하나만 다르답니다. 이를 훗날 번역자가 혼동해 ‘밧줄’을 ‘낙타’로 잘못 적어놓은 것이 널리 퍼져 지금에 이르게 됐다네요.


즉 이 표현은 ‘권력이 있거나 재물이 많은 사람이라도 약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도와 밧줄 같은 자신을 가는 실로 만들면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의미로 쓰인 거라고 합니다. 참 멋진 비유입니다. 그것을 오역해 놓은 것이라면 참 아쉽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낙타’를 ‘밧줄’로 바로잡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이미 굳을 대로 굳은 말이므로, 그냥 써도 됩니다.


그런데요. 낙타가 예전 성경에는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따위처럼 ‘약대’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약대’가 ‘낙타’로 고쳐졌지요. 저는 이 부분이 더욱 아쉽습니다.


‘약대’는 한자말 ‘낙타(駱駝 )’를 뜻하는 순우리말로, <석보상절>(세종 28년에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에 따라 소헌왕후 심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쓴 책)에도 실려 있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쓰던 말이기 때문입니다. 순우리말 ‘약대’가 한자말 ‘낙타’에 완전히 밀려난 것 같아 마음이 헛헛합니다.


또 우리가 흔히 ‘바늘구멍’이라고 하는 것을 성경은 ‘바늘귀’라고 제대로 쓰고 있음도 눈길을 끕니다. 원래 ‘바늘구멍’이라고 하면 “바늘로 뚫은 작은 구멍”을 뜻합니다. “실을 꿰기 위해 바늘의 위쪽에 뚫은 구멍”은 ‘바늘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너나없이 ‘바늘구멍’을 쓰는 까닭에 사전들도 ‘바늘구멍’의 또 다른 뜻으로 ‘바늘귀’를 다뤄놓고 있습니다.


한편 바늘과 관련해 많은 사람이 “자신이 입을 드레스를 한 뜸 한 뜸 바느질하면서 느끼는 보람도 크다고 합니다” 따위처럼 ‘뜸’을 쓰는 일이 흔한데요. 우리말에서 ‘뜸’은  “ 짚, 띠, 부들 따위로 거적처럼 엮어 만든 물건(비, 바람, 볕을 막는 데 쓴다)” “음식을 찌거나 삶아 익힐 때에, 흠씬 열을 가한 뒤 한동안 뚜껑을 열지 않고 그대로 두어 속속들이 잘 익도록 하는 일” “한동네 안에서 몇 집씩 따로 모여 있는 구역” “물에 띄워서 그물, 낚시 따위의 어구를 위쪽으로 지탱하는 데에 쓰는 물건” “병을 치료하는 방법의 하나” 등의 뜻으로 쓰입니다. 어느 것도 ‘바느질’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바느질할 때 실을 꿴 바늘로 한 번 뜸. 또는 그런 자국” “실을 꿴 바늘로 한 번 뜬 자국을 세는 단위”를 뜻하는 말은 ‘뜸’이 아니라 ‘땀’입니다. 따라서 ‘한 뜸 한 뜸’이 아니라 ‘한 땀 한 땀’으로 써야 합니다.

Posted by margeul

 

만약 제가 종로 한복판에 서서 “여자에게도 불알이 있다”라고 외친다면 분명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겁니다. 어느 할머니가 작대기를 들고 나와 실성한 놈이라며 냅다 후려칠지도 모르죠.


하지만 정말로 여자에게도 불알이 있습니다. 그것도 두 개나.


많은 사람이 ‘귓볼’이라고 부르는 거 있죠? 귓바퀴(겉귀의 드러난 부분)의 아래쪽으로 축 늘어진 살 말입니다. 사람들은 “뺨의 한복판”을 일컫는 말 ‘볼’이 ‘귀’에 더해진 말로 알고 그리 쓰는 듯싶은데요. ‘귓볼’은 바른말이 아닙니다.


‘귓볼’만큼 많이 쓰이는 ‘귓방울’도 마찬가지죠. 이들 말은 광복 이전의 <조선어 표준말 모음>에서부터 버리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귓볼’과 ‘귓방울’로 쓰이는 말의 바른말은 뭘까요? 바로 ‘귓불’입니다. 이때의 ‘불’은 “불알을 싸고 있는 살로 된 주머니” 또는 “불알의 준말”로 쓰이는 말입니다. 결국 ‘귀불알’이 줄어서 된 말이 ‘귓불’이라는 얘기죠. 그러니 여자에게도 불알이 있다는 제 얘기가 아주 허무맹랑한 소리만은 아니죠?

     귀걸이(=귀고리)를 다는 부위는 '귓볼'이 아니라 '귓불'이다. 사진 | 경향신문DB

 

 

‘귓볼’과 함께 ‘귓밥’도 열에 아홉은 잘못 쓰는 말입니다.


흔히 “귓밥을 팠더니 시원하다”거나 “귓구멍에 귓밥이 가득 찼다”고 말하는데, 귓밥은 절대로 죽어도 파낼 수 없습니다. 하늘이 두 쪽 난다고 해도 귓구멍에 귓밥이 낄 수 없고요.


왜 그럴까요? 우리말에는 그런 말이 없어서? 사투리라서?


아닙니다. ‘귓밥’은 분명 떳떳한 우리말이요, 튼튼한 바른말입니다. 다만 ‘파다’나 ‘차다’ 따위의 말과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귓밥’이란 “귓불, 즉 귓바퀴의 아래쪽으로 늘어진 살의 두툼한 정도”를 뜻하는 말이기 때문이지요. 즉 ‘귓불’의 두께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얘기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파내고, 그것이 어떻게 귓구멍에 찰 수 있겠습니까.


“귓구멍에 낀 때”를 가리키는 말은 ‘귀지’입니다. 한자말로는 이구(耳垢)라고 합니다. ‘垢’는 ‘때’ ‘더럽다’ 등을 뜻하는 한자입니다.


‘귀지’는 예전엔 ‘귀에지’의 준말로 보던 것인데, 1988년 한글맞춤법 표준어규정 개정 때 ‘귀에지’는 버리고 ‘귀지’만을 표준어로 삼았습니다. 원말은 사라지고 준말만 남았으니,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셈이지요.


또 더러 ‘귀지’를 ‘귀똥’이라고 일컫는 사람도 있는데요. 어째 말꼴이 좀 지저분해 보입니다. 당연히 바른말이 아닙니다.


“귓밥을 판다” “귓구멍에 귀똥이 가득 찼다” “귀에지가 귀에서 쏟아질 지경이다” 따위의 말에서 보이는 ‘귓밥’ ‘귀똥’ ‘귀에지’는 모두 ‘귀지’라고만 써야 합니다.


“어린아이의 말로, 더러운 것을 이르는 말”로 쓰이는 ‘지지’와 “귓구멍 속에 낀 때”를 의미하는 ‘귀지’. 뭔가 닮지 않았나요? 이런 게 우리말입니다.

Posted by margeul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귀밑을 스치는 바람에 냉기가 가득하네요. 이처럼 추운 날을 따뜻하게 보내는 비법, 그게 뭔지 아세요? 바로 웃음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웃음은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묘약이고, 마음이 따뜻하면 몸도 따뜻해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이 글을 읽는 경향신문 독자 여러분이 잠깐이라도 웃음을 지을 수 있도록 재미난 얘기를 들려 드릴까 합니다.

요즘처럼 찬바람이 불 때면 문득 생각나는 노래가 하나 있습니다. “손이 시려워 꽁, 발이 시려워 꽁”이라는 가사가 나오는 동요 말입니다. 겨울이면 무척 많이 듣는 노래죠.

             서울의 마지막 비밀정원으로 불리는 서울 종로구 부암동 백사실계곡내 연못이 흰 눈으로 덮여 있는 모습. 경향신문DB

 

하지만 우리 귀에 익은 노랫말과 달리 사람의 손과 발은 절대 ‘시려울’ 수가 없습니다. ‘시려워’ 꼴의 글자가 만들어지지 않거든요. 왜냐고요?

우리말에서 ‘시려워’라는 말을 쓰려면, 그 말의 기본형이 ‘시렵다’가 돼야 합니다. 낱말의 기본형에 반드시 비읍(ㅂ) 받침이 있어야 하는 거죠. ‘고맙다’가 ‘고마워’가 되고, ‘반갑다’가 ‘반가워’가 되는 것처럼, 어떤 말이든 그 말에 비읍 받침이 있어야 ‘워’라는 소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추위를 느낄 정도로 차다”를 뜻하는 말은 ‘시렵다’가 아니라 ‘시리다’입니다. 애인이 없는 사람들이 ‘옆구리가 시리다’라고 할 때 쓰는 그 ‘시리다’가 기본형입니다. 그리고 ‘시리다’를 활용하면 ‘시려워’가 아니라 ‘시려’가 됩니다.

다른 말로 설명하면, “날콩이나 물고기 따위에서 나는 냄새”를 가리키는 말인 ‘비리다’가 있습니다. 그것을 “생선이 비려워”라고 쓸 수 있나요? 당연히 없지요. 그러니까 ‘시리다’도 ‘시려워’로 못 쓰는 것입니다. ‘비리다’가 ‘비려’가 되듯이 ‘시리다’ 역시 ‘시려’가 되는 거지요.

추위와 관련해 자주 쓰는 말 중에 ‘오돌오돌’도 참 많이 틀리는 낱말입니다. “얘, 내가 너 기다리느라 얼마나 오돌오돌 떨었는지 아니?”라고 할 때의 그 ‘오돌오돌’ 말입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대부분 이런 표현을 쓴 적이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오돌오돌’ 떨 수는 없습니다. 왜냐고요?

정답부터 말씀드리면 사람은 ‘오돌오돌’ 떠는 게 아니라 ‘오들오들’ 떠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요. ‘오돌오돌’과 ‘오들오들’은 뜻이 다른 말이라는 얘기입니다.

‘오돌오돌’은 “작고 여린 뼈나 말린 날밤처럼 깨물기에 조금 단단한 상태”를 뜻합니다. 즉 날밤을 깨물어 먹거나 누룽지를 그냥 씹어 먹을 때의 느낌, 그게 바로 ‘오돌오돌’한 것이지요.

그리고 “춥거나 무서워서 몸을 잇달아 심하게 떠는 모양”을 뜻하는 말은 ‘오들오들’입니다.

Posted by margeul

“부장님의 말씀도 계셨고 하니, 이번 단합대회에는 다들 참석해 주세요”라거나 “부장님 말씀이 안 계셔서 그냥 넘어갔습니다” 따위처럼 ‘말씀이 계시다’는 참 널리 쓰이는 표현입니다. ‘계시다’가 ‘있다’의 높임말이다 보니, 존경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계시다’가 ‘있다’의 높임말이기는 하지만, 아무 때고 ‘있다’를 ‘계시다’로 높여 쓸 수는 없습니다. ‘계시다’는 사람(그중에서도 윗분)이 있다거나 사람이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을 높일 때 쓰는 말입니다. 동물이나 사물에는 ‘계시다’를 쓸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가 허리를 펴고 계신다’는 가능하지만 ‘구부러진 철사가 펴지고 계신다’라고 쓸 수는 없습니다. 또 ‘할아버지께서 졸고 계신다’는 가능하지만 ‘강아지가 졸고 계신다’나 ‘꽃이 피고 계신다’라고 쓸 수도 없습니다. ‘사장님이 서류를 정리하고 계신다’는 가능하지만 ‘사장님 서류가 계신다’ 역시 쓸 수 없지요.

따라서 ‘부장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셨다(부장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돼도 ‘부장님의 말씀이 계셨다’는 안 됩니다.

             드라마 <직장의 신> 포스터

 

‘있다’를 아무 때나 ‘계시다’로 높이는 사례에서 보듯이 우리 주변에서 높임말을 잘못 쓰는 일이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말의 특징 중 하나가 ‘높임말이 발달했다는 점’인데, 바로 이 때문에 잘못 쓰는 일도 흔합니다. 모르는 사람이나 윗분에게는 존댓말을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아무 때나 높임말을 쓰는 것이지요.

어떤 상품을 파는 현장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고객님, 수리는 가능하지만 새 상품으로 교환은 안 되세요” “고객님, 그 상품은 품절되셨고요. 오늘은 이 상품이 세일 중이세요” 따위 표현도 높임말을 잘못 쓴 사례입니다.

 

이들 표현은 얼핏 아주 친절한 말로 들립니다. 하지만 조금만 따져 보면 아주 무례한 표현임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교환이 안 되는 것이 새 상품이고, 품절된 것도 상품이며, 세일하고 있는 것 역시 상품입니다. 그런데 상품을 가리키는 말에 존대를 뜻하는 ‘시’를 붙였습니다. 즉 위의 문장은 물건을 사는 고객을 높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파는 상품을 높인 표현입니다.

우리가 높여야 하는 대상은 사람이지, 사물이 아닙니다. 따라서 사물과 호응하는 말에 높임을 뜻하는 말을 써서는 안 됩니다. 넥타이를 맨 부장님이 멋있으셔야지, 부장님이 맨 넥타이가 멋있으시면 안 되는 것이지요.

 

또 “잠시 기다리실게요” “일시불로 하실게요” “이곳에 사인하실게요” 등처럼 우리말법도 모른 채 무조건 말 끝에 ‘시’만 붙이면 높임말이 되는 것처럼 쓰는 표현도 문제입니다. 위의 문장은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잠시 기다려 주세요)” “일시불로 처리해도 될까요” “이곳에 사인해 주세요”라고 하는 것이 우리말다운 표현입니다.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참된 높임이지, 자기의 일방적인 의사에 ‘시’를 붙였다고 해서 높임의 뜻이 담기는 것은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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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글은 생명체입니다. 필요에 따라 생성되고, 쓰이는 과정에서 변화·성장하고, 더러는 세월 속에 소멸하기도 합니다. 어제의 사투리가 오늘에는 표준어가 되고, 오늘의 표준어가 내일에는 사어(死語)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말과 글을 화석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적잖습니다. 특히 나이가 좀 드신 분들 중에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옛날만 알고 오늘은 모르는 거죠.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아버지’를 ‘아빠’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대체 언제부터일까요? 우리말에서 ‘아빠’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30년대이고, 표준어로 대접받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입니다.

 

‘아빠’는 표준어가 된 후에도 ‘아이들이나 쓰는 말로, 성인이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게 우리말 표준화법의 원칙이었습니다. 하지만 2012년 국립국어원은 ‘표준 언어 예절’을 정하면서 어른들도 자기 아버지를 ‘아빠’로 쓸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이런 것이 말이고 글입니다.

직장에서 쓰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는 쓰기 어색하던 말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쓰이곤 합니다.

 

‘형’도 그런 말 가운데 하나죠. “가족 간의 호칭에서 윗사람에게 쓰이는 ‘형’을 직장에서 쓰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게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그러나 국립국어원의 ‘표준 언어 예절’은 자기와 직급이 같은 동료를 부르거나 가리킬 때는 ‘형’을 쓸 수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직급이 아래인 사람에게도 ‘형’을 쓸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세월이 변한 것입니다.

 

다만 직함이 없는 선배, 또는 직급이 같지만 나이가 많은 선배에게 ‘김형’ ‘이형’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가정에서는 ‘형’이 윗사람을 지칭하지만, 사회에서는 ‘형’이 주로 동년배나 아랫사람에게 쓰이기 때문입니다. 또 여자 후배가 남자 선배에게 ‘형’을 쓰는 것도 좋지 않다고 ‘표준 언어 예절’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윗사람에게 ‘형’을 쓰는 것 역시 직장 내에서 자연스럽지 않은 언어습관입니다.

결국 세월이 흐르는 동안 직장에서 ‘형’을 쓰는 일이 과거보다 많아졌지만, 현재까지는 자기와 나이·직급이 같은 동료나 나이·직급이 낮은 사람에게만 쓰고, 그 외에는 쓰지 말아야 합니다.

‘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 직원이 여자 선배를 ‘언니’ 또는 ‘○○ 언니’로 부르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나이가 드신 분들에게는 직장에서 ‘형’이니 ‘언니’니 하고 부르는 것이 귀에 거슬리겠지만, 국립국어원이 정한 ‘표준 언어 예절’에 벗어난 호칭은 아닙니다. 다만 ‘○ 언니’ ‘미스 ○ 언니’로는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표준 언어 예절’은 밝히고 있습니다.

‘선배’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직함을 가진 윗분 중에서는 자신을 ‘○○○ 부장님’ 따위로 부르지 않고 ‘○ 선배님’이라고 부르면 불쾌해하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기분일 뿐 그것이 우리말 예절에 어긋나는 호칭은 아닙니다. 특히 신문사 등에서는 ‘○ 부장님’보다 ‘○ 선배’로 불리기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 맞춰 상사에게도 ‘선배님’이란 호칭을 쓸 수 있도록 한 것이겠지요.

하지만 만약 독자 여러분의 주변에서 ‘선배’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한다면 ‘○ 부장님’ ‘○ 선생님’ ‘○ 여사님’ 등으로 불러주세요. 거 뭐,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 게 인지상정인데, 산 사람 소원 하나 못 들어줍니까.

아무튼 세월 속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호칭도 언중(言衆)이 널리 쓰는 사례를 쫓아갑니다.

자, 그건 그렇고요. 직장에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나누는 대화에서 종종 이런 장면을 보게 됩니다.

엄 부장 : 손 대리, 조 과장 어디 갔어.
손 대리 : 조 과장님, 잠깐 외출하셨나 봅니다.
엄 부장 : 손 대리, 군대 안 갔다 왔어. 조 과장님이라니? 내가 조 과장 밑이야.

어떠세요. 이런 상황을 접한 적 있죠. 특히 군대를 갔다 온 남자들은 이등병 시절에 병장에게 ‘○ 상병님’ 하다가 혼쭐난 적이 한두 번은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때 손 대리가 ‘조 과장님’이라고 한 것은 옳은 표현입니다. 직장 내 압존법(문장의 주체가 말하는 사람보다는 높지만 듣는 사람보다는 낮아, 주체를 높이지 못하는 어법)은 일본식 언어 습관입니다. 우리말에서 압존법은 가정에서만 제한적으로 쓰일 뿐 학교와 직장에서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누가 그러냐고요? 누구긴요. 국립국어원이 그러죠.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회장님께 말씀드리며 “김 사장이 그러는데요”라고 하는 것을 김 사장님이 우연히 들었다면 여러분을 그냥 두겠습니까? 바로 자르겠지요. 그래서 우리말법은 말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모두 존칭어를 쓸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높여야 할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높여야 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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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파비앙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삼촌댁에 방문해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렸다.” “13세 때 기자가 되기 위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덴버에 있는 삼촌댁으로 달아났다.”

 

위의 두 문장은 신문과 방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 얼핏 보면 아주 평범합니다. 하지만 위의 글은 띄어쓰기 하나 때문에 아주 우스꽝스러운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바로 ‘삼촌댁’ 때문인데요.

 

우리말에서 ‘댁(宅)’을 붙여 쓰면, “(누구의) 아내”를 뜻하거나 “어느 지역에서 시집온 여자”를 의미하게 됩니다. “오라버니의 아내”는 ‘오라버니댁’(새언니), “철수의 부인”은 ‘철수댁’이 되는 것이지요. 또 상주에서 시집온 사람은 ‘상주댁’이 되고, 파주에서 시집온 사람은 ‘파주댁’이 됩니다.

 

따라서 위의 예문에서 ‘삼촌댁’으로 붙여 썼기 때문에, 이 말은 ‘작은어머니’가 되고 말았습니다. 위의 문장 속의 ‘삼촌댁’을 ‘작은어머니’로 대체하고 읽으면 아주 어색하지요?

 

                     집이나 가정을 뜻하는 '댁'은 반드시 띄어 써야 합니다

 

“남의 집이나 가정을 높여 이르는 말”로 쓰는 댁은 명사로, 앞말과 띄어 써야 합니다.

 

“선생님 댁을 다녀왔다.”

 

“뉘 댁 자제인지는 모르나 말조심하게.”

 

따위처럼요.

 

띄어 쓰는 ‘댁’은 또 “남의 아내를 대접해서 이르는 말”로, 주로 대등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나 아랫사람의 아내를 가리킬 때 쓰이기도 합니다.

 

“동생의 댁.”

 

“윗목에서 딸들을 데리고 밥을 먹으며 동재의 댁 화순이는 이리 고개를 돌리고 웃어 보인다.”(염상섭의 <젊은 세대> 중에서)

 

등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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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중요함을 얘기할 때 ‘면장도 알아야 한다’거나 ‘알아야 면장을 한다’ 따위로 말합니다. 하지만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논리적으로 맞는 표현이지만, ‘면장도 알아야 한다’는 좀 이상한 표현이 됩니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말 속의 ‘면장’을 동네 이장 위 또는 군수 아래의 면장님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듯합니다. 예전에 한 후배에게서 그런 얘기를 듣고 웃었던 일도 있습니다. 사실 저도 어렸을 때는 그러려니 생각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면 서기’만 돼도 무척 똑똑하고 높은 분인데, ‘면장(面長)님’이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똑똑하고 높은 분으로 생각했던 거지요.

 

그래서 면장(님)이 되려면 아는 것이 많아야 된다고 생각했고, ‘면장도 알아야 한다’는 이치에 맞는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위 얘기의 ‘면장’은 이장님보다 높지만 군수님보다는 낮은 ‘면장님’과는 눈곱만큼도 관계가 없습니다. 이때의 ‘면장’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함에서 벗어난다”는, 즉 ‘면면장(免面牆)’이 줄어든 면장(面牆 또는 面墻)입니다.

 

                         영화 <공자>의 포스터

 

이 말은 공자가 자기 아들에게 “시경의 ‘수신’과 ‘제가’에 대해 공부하고 익혀야 담장을 마주하고 있는 듯한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친 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논어에 나오는 얘기지요.

 

그러고 보면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도 썼던 말이고, 우리나라 면장제가 확립된 것은 1910년 10월 일제가 수탈정책을 강화하고자 하부 지방행정조직까지 정비할 목적으로 ‘면에 관한 규정’을 제정한 때부터이니, 조금만 생각해도 ‘알아야 면장을 한다’의 ‘면장’이 面長이 아님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역시 알아야 면장을 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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