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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헷갈리는 말 가려 써야 의미가 통한다'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2.10.25 애끓다와 애끊다의 엄청난 차이
  2. 2012.09.29 사람 낳고 돈 났다고?
  3. 2012.09.27 살찐 전어는 못 먹는다 (1)
  4. 2012.09.21 고주망태와 모주망태
  5. 2012.09.17 아이들에게 ‘조막손’을 쓰지 마라
  6. 2012.09.13 눈에 콩깍지가 씌우면 안 된다

오래전 일입니다. 하루는 출근길에 신문 한 부를 사서 읽다가 상쾌한 아침을 도둑맞고 말았습니다. 한 기사의 제목 때문인데요. 그 기사는 익사사고로 남매를 잃고 통곡하는 어느 아버지의 이야기였습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지만, 밝고 맑게 자라준 아이들. 학교 성적도 좋고, 피자를 사 주지 못하는 아버지와 칼국수를 맛있게 먹어 주는 아이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자식을 둘이나 잃어버린 아버지는 신문 속에서도 통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버지의 심정은 아마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비통한 기사를 다룬 편집자는 아버지의 심정을 고작 ‘애끓는 사연’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죠. 생떼같은 자식을 둘이나 잃고 애만 끓이는 부모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일부 생선의 간을 가리키기도 하는 ‘애’는 ‘창자’의 옛말입니다. 그런데 애가 끓는다고 하면, 그것은 “몹시 답답하거나 안타까워 속이 끓는 듯하다”는 뜻의 말밖에는 안 됩니다. 속상해하는 정도의 말인 것이지요.

그 편집자는 ‘애끓는 사연’이 아니라 ‘애끊는 사연’이라고 표현했어야 합니다. 창자가 끊어질 듯한 고통, 곧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전해야 했던 거지요.

 

이순신 장군도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라며 왜구에 짓밟힌 나라를 근심했지요.

옛말에 부모가 죽으면 청산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고 했습니다. 산에 묻은 부모는 더러 잊고 살 수 있지만, 가슴에 묻은 자식은 부모가 목숨을 놓을 때까지 그 가슴을 후벼 팔 겁니다.

그 편집자의 실수는 이미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진 그 아버지의 창자를 또다시 찢어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엄청난 망발이 다시는 신문이나 방송에 오르내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요.

Posted by margeul

‘낫다’ ‘낳다’ ‘났다’의 의미의 구분은 그닥(→그다지) 어렵지 않는데, 활용형에서 잘못 쓰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낫다’는 “병이나 상처 따위가 고쳐져 본래대로 되다”를 뜻하는 말로,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감기가 낫는 것 같더니 다시 심해졌다.
간염은 잘 낫지 않는 병이다.

따위처럼 쓰입니다.

또 ‘낫다’는 “보다 더 좋거나 앞서 있다”를 의미하는 말로,

서민들 살기에는 아무래도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
형보다 동생의 인물이 낫다.
그는 전에 다니던 회사보다 대우가 더 나은 회사로 옮겼다.

등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이와 달리 ‘낳다’는 “배 속의 아이, 새끼, 알을 몸 밖으로 내놓다” “어떤 결과를 이루거나 가져오다” “어떤 환경이나 상황의 영향으로 어떤 인물이 나타나도록 한다(배출하다)” “삼 껍질, 솜, 털 따위로 실을 만들다” “실로 피륙을 짜다” 등의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새끼를 낳다.
자식을 낳아 기르다.
서로 간에 불신을 낳아 협력 관계가 무너지고 말았다.
그는 우리나라가 낳은 천재적인 과학자다.
명주실을 낳다.
안동포를 낳다.

따위로 쓰이는 것이지요.

그러나 ‘났다’라는 낱말은 없습니다. ‘났다’는

신체 표면이나 땅 위에 솟아나다(여드름이 나다 / 풀이 나다).
길, 통로, 창문 따위가 생기다(길이 나다).
어떤 사물에 구멍, 자국 따위의 형체 변화가 생기거나 작용에 이상이 일어나다(흔적이 나다).
신문이나 잡지 따위에 어떤 내용이 실리다(기사가 나다).
홍수, 장마 따위의 자연재해가 일어나다(홍수가 나다).
돈, 물건 따위가 생기다(돈 나다).
인물이 배출되다(천재가 나다).

등의 뜻으로 쓰이는 ‘나다’를 활용한 형태입니다. ‘가다’를 활용해 “나는 집에 갔다”로 쓴 것과 똑같죠. ‘나다’는 여기에 올려놓은 것 외에도 의미가 무척 다양한 말이니, 사전을 한 번 뒤져 보시기 바랍니다.

의미 구분은 이 정도면 충분할 듯한데요. 이들 말에서 활용을 잘못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형이 동생보다 났다”고 할 때의 ‘났다’도 그중 하나입니다. 저 앞에서 ‘낫다’의 예문에도 적어 놓았듯이 “무엇보다 무엇이 좋다”라는 의미를 나타내려면 ‘나다’를 활용한 ‘났다’가 아니라 ‘낫다’로 써야 합니다.

“형이 동생보다 낫다”라고요.

또 병이 생긴 것은 ‘병이 났다’로, 병이 없어진 것은 ‘병이 나았다’로 써야 합니다.

 

 

                                         상평통보 / 네이버 캡처

흔히 “사람 낳고 돈 낳지, 돈 낳고 사람 낳지 않았다”라거나 “돈 낳고 사람 났냐. 사람 낳고 돈 났지”라고 말하는 표현 속의 ‘낳다’도 잘못 쓴 말입니다.

이때는 ‘나다’의 아래쪽에 보이는 예문처럼 ‘나다’를 활용해 써야 합니다. 사람은 출산할 수 있겠지만 돈은 출산할 수 없으니, ‘낳다’를 쓸 수 없는 것이지요.

이와 관련한 우리 속담도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나(아무리 돈이 귀중하다 하여도 사람보다 더 귀중할 수는 없다는 뜻으로, 돈밖에 모르는 사람을 비난하여 이르는 말 )”가 바른 표현입니다.

Posted by margeul

가을에 가장 맛있다고 해서 ‘가을 전어’로까지 불리는 전어가 요즘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저도 전어 회무침에 소주 한잔을 기울였지요. 그런데 함께 술을 마시던 후배가 ‘살찐 전어’라는 얘기를 해 제가 쿠사리를 줬답니다.

 

 

 

왜냐고요? ‘살찐 전어’는 굽지도 못하고, 회를 뜰 수도 없거든요. 제 후배뿐 아니라

 

“살찐 암소와 충실한 이삭은 풍년이요, 파리한 암소와 마른 이삭은 흉년을 의미한다.”(국민일보)
“통통하게 살찐 쫄깃쫄깃한 주꾸미 속살 맛은 물론이고, 주꾸미 먹물이 깊게 밴 흑갈색 육수의 만남이 또 다른 맛의 세계로 유혹한다.”(매일신문)
“남해에선 살찐 전어가, 동해에선 등 푸른 방어 살에 기름기가 오른다.”(연합뉴스)
“하루는 아내가 살찐 암탉을 잡아, 옹기솥으로 끓인 후 보냈더니….”(네이버 카페)

 

등의 예문에서 보듯이 ‘살찐+동물’의 표현을 많이 쓰는데요. 제 경험상 이들 표현 중 열에 아홉은 잘못된 말이더군요.

 

‘살찌다’는 “몸에 살이 필요 이상으로 많아지다”나 “(비유적으로) 힘이 강하게 되거나 생활이 풍요로워지다”를 뜻하는 말로, 품사가 ‘동사’입니다.

 

‘살찌다’가 동사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동사는 “사물의 동작이나 작용을 나타내는 품사”입니다.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죠.

 

이와 관련해 <표준국어대사전>은

 

살찐 뚱뚱한 사람.
살쪄서 바지가 작다.
너무 살찌면 움직임이 둔할뿐더러 건강에도 해롭다.
그녀는 얼굴이 동그스름하고 살찐 엉덩이를 가지고 있었다.
밖에서는 오월의 신록을 살찌게 하는 조용한 부슬비가 부슬거리고 있었다.

 

등의 예문을 들어놓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우리말에는 여러분이 별로 쓰지 않는 ‘살지다’가 있습니다.

 

“살이 많고 튼실하다” “땅이 기름지다” “과실이나 식물의 뿌리 따위에 살이 많다” 등을 뜻하는 ‘살지다’는 품사가 ‘형용사’입니다. 형용사는 “사물의 성질이나 상태를 나타내는 품사”입니다.

 

결국 ‘살찌다’는 살이 찌는 동작을 나타내고, ‘살지다’는 살이 찐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살찐 생선’ 따위 표현은 쓸 수 없습니다. ‘생선’은 “말리거나 절이지 아니한, 물에서 잡아낸 그대로의 물고기”를 뜻하는 말로, 잡혀서 죽거나 죽어가는 물고기가 점점 더 살이 찔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살찐 소(돼지, 닭)를 잡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이 찌고 있는 소를 잡는 것이 아니라, 이미 살이 통통하게 오른 소 등을 잡는 것이니, ‘살진 소를 잡다’ 따위로 써야 합니다.

사람과 관련해서는 대개 ‘살찌다’가 쓰이고, 사람 외에 동식물이나 땅 등에는 ‘살지다’가 쓰이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이는 우리가 일생생활에서 사람에게는 ‘살이 찌는 과정’을 가리키는 일이 흔하고, 동물 등에 대해서는 살이 찌는 동작이나 진행보다는 상태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참, 제가 저 앞에서 ‘쿠사리’라는 말을 썼는데요. 이 말은 순전히 일본말로, 하루바삐 우리 언어생활에서 없애 버려야 할 말입니다. ‘핀잔’ ‘면박’ ‘야단’ ‘꾸지람’ ‘지청구’ 등을 말 속의 의미에 맞게 쓰면 됩니다.

Posted by margeul

“어쩌면 내일부터는 그 고주망태들이 개과천선할지도 모를 테니까….”


어느 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기사를 쓴 기자가 술과 별로 친하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고요? 만약 그 기자가 술과 친하다면 ‘고주망태’의 뜻쯤은 알 텐데, 이 기사 속의 ‘고주망태’는 잘못 쓴 말이거든요.


‘고주망태’는 “술에 몹시 취해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 또는 그런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즉 ‘고주망태’는 ‘지금’ 술에 취해 있는 상태이거나 그런 사람을 뜻하는 거지요.

                                            네이버 캡처


 

따라서 “몸도 못 가눌 만큼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거나 “엄 기자 그 녀석, 어제 소주 몇 잔에 아주 고주망태가 되더구먼” 따위의 표현은 ‘고주망태’를 제대로 쓴 사례입니다.


그러나 “야, 이 고주망태야. 오늘은 제발 술 마시지 말고 집에 일찍 좀 가라”라는 표현의 ‘고주망태’는 바르게 쓰인 말이 아닙니다. 어제는 ‘고주망태’였을지 몰라도 오늘 지금은 ‘고주망태’가 아니니까요.


이때는 ‘모주망태’라고 해야 합니다. ‘모주망태’는 “술을 늘 대중없이 많이 마시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지요.


여기서 ‘모주’는 “약주를 뜨고 난 찌끼술”을 뜻합니다. 거뭇하고 걸쭉하며 아주 독한 술이죠. 그리고 ‘망태’는 그 모주를 거르거나 퍼 담는 ‘망태기’의 준말입니다.


즉 ‘모주망태’는 모주에 찌든 망태기처럼 늘 술독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Posted by margeul

손가락 가운데 가장 굵은 첫째 손가락은 ‘엄지손가락’ 혹은 ‘엄지손’ ‘엄지가락’이라고 합니다. 한자어로는 대지(大指) 거지(巨指) 무지(拇指)라고 하는데, 손도장을 ‘무인’이라고 함은 바로 ‘엄지손가락 도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둘째 손가락은 ‘집게손가락’ ‘식지(食指)’ ‘염지(鹽指)’ ‘인지(人指)’라고 하며, 가운데 긴 손가락인 셋째 손가락은 ‘가운뎃손가락’ ‘중지(中指)’ ‘장지(將指, 長指)’라고 합니다.

 

또 예부터 우리 선조가 위급한 사람을 위해 피를 내어 입에 물리거나 탕제를 젓던 넷째 손가락은 ‘약손가락’ 혹은 ‘약손’으로 불립니다. 한자어로는 ‘무명지(無名指)’ ‘약지(藥指)’라고 하고요. 가장 작은 다섯째 손가락은 ‘새끼손가락’ ‘새끼손’ ‘계지(季指)’ ‘소지(小指)’라고 합니다.

 

그러나 엄지를 뜻하는 ‘모지’, 가운뎃손가락을 뜻하는 ‘장가락’, 새끼손가락을 달리 부르는 ‘애끼손가락’은 모두 바른말이 아닙니다. 손도장을 뜻하는 ‘무인’을 ‘모인’으로 쓰는 사람도 있는데, 이 역시 바른말이 아닙니다.

 

손과 관련해 가장 흔히 잘못 쓰는 말은 ‘조막손’일 듯싶습니다.

 

특히 5월이면 “조몰락 조몰락… 초보 조막손 장인을 꿈꾸다” 따위처럼 어린아이의 손을 ‘조막손’으로 표현한 글이 언론에 많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손을 ‘조막손’으로 표현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조막손’이란 “손가락이 없거나 오그라져서 펴지 못하는 손”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즉 정상적인 손이 아니라 장애를 지닌 손입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맹활약하며 인간승리를 보여준 짐 애보트(오른손의 손가락이 거의 없음)나 모데카이 브라운(오른손의 손가락이 3개뿐임)이 대표적 조막손이(조막손을 가진 사람)입니다.

 

‘조막손’의 조막은 ‘조각’의 옛말로 보입니다. 옛 문헌에 ‘조각 구름을’을 ‘조막 구루믈’로 쓴 것이 보입니다. 즉 손가락 전체가 아니라, 일부 조각이라는 의미에서 생긴 말이 ‘조막손’인 셈입니다. 모든 아이의 손을 그렇게 부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의 작은 손을 귀엽게 이르는 말로 쓸 만한 것이 ‘아직은’ 없다는 점입니다. ‘고사리손’이 널리 쓰이고 있기는 하나, 이 말을 표제어로 올려놓은 사전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전들이 모두 ‘고사리 같은 손’을 관용구로 올려놓고 있으니, ‘고사리손’을 써도 괜찮을 듯합니다. 사전들이 어서 표제어로 올려놓으면 더욱 좋고요.

 

한편 ‘조막손’의 조막, 즉 ‘조각’의 옛말인 ‘조막’은 쓸 수 없지만, 주먹의 작은말인 ‘조막’은 바른말입니다. “조막만한 게 까부네”라고 할 때의 ‘조막’ 말입니다.

Posted by margeul

사람들이 흔히 쓰는 말 중에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표현을 쓴 적이 있을 듯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조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표현입니다.


‘콩깍지’는 “콩을 털어 내고 남은 껍질”입니다. 그것이 눈에 씌면 아무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말은 ‘아무것도 안 보인다’는 의미보다는 ‘뭔가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뜻이 강합니다.


이런 점에서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말보다는 ‘눈에 콩 꺼풀이 씌었다’는 표현이 좀 더 격에 어울릴 듯합니다. 콩을 불리면 벗겨지는 ‘콩 꺼풀’은 반투명해, 그것이 눈에 씌면 사물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왜곡돼 보일 것입니다. 실제로도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 못지않게 ‘눈에 콩 꺼풀이 씌었다’도 널리 쓰입니다.





그러나 ‘눈에 콩깍지 씌었다’를 틀렸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표현은 일종의 관용구로, 사람들이 같은 의미로 공유한다면 바른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눈에 콩깍지가 씌든 콩 꺼풀이 씌든 상관없지만,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씌다’를 ‘쓰였다’ ‘씌였다’ ‘씌웠다’ 따위로 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의 ‘씌다’는 ‘쓰다’의 피동사와 사동사인 ‘쓰이다’ ‘씌우다’의 준말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자동사입니다. 따라서 어간 ‘씌’ 뒤에 어미들을 붙여야 합니다. ‘씌면’ ‘씌고’ ‘씌어서’ ‘씌었고’ 등처럼요.


‘귀신에 씌었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귀신에 씌웠다’로 쓰면 안 되는 것이죠.


참, ‘콩깍지’는 하나의 말이니까 붙여 쓰지만 ‘콩 꺼풀’은 띄어 써야 한다는 것도 알아두세요.

Posted by margeul